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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단편소설] 환경진화론

by 어푸푸푸 2021. 6. 29.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집에 얹어진 지붕을 수리하겠다는데, 어째서 구청에 허가를 받아야 되는 것인가. 하루 종일 속이 터져 한숨만 쉬고 있는 내게 아내가 조용히 타일렀다. , 눈 꼭 감고 다녀와요. 당신 요즘 너무 예민해서 그런거야. 원래 법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래요. 아내의 핀잔에 속만 더 쓰리다. 아니, 누가 그래? 민찬이가 그러죠. 아들놈이 그랬단다. 법을 공부하는 아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 외투를 껴입는다. 괜스레 신경질이 난다.

 

, 그 놈은 왜 전화 한통 없대?

 

공부하느라 바쁜가보죠. 행시인가 뭐시긴가가 그렇게 쉽나요. 아내는 이미 TV를 틀었다. 철 지난 드라마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고 개도 죽고 사람도 죽는 그런 드라마. 나는 신분증과 몇가지 서류를 챙겨서는 등산화를 신었다. 티비를 보던 아내의 눈이 순식간에 온몸을 훑어 내린다. 아니, 코앞 구청에 가는데 왜 등산화를 신고 가요?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등 뒤에 아내의 목소리가 따라 붙는다. 그래도 아들놈이 사줬다고 좋나보네요.

 

망할 여편네.

 

구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지난 번에 봤던 담당직원이 보였다. 재수없는 자식. 능글맞게 웃으며, 사람 속을 긁는 녀석. 안녕하세요. 고객님. 또 오셨네요. 또 왔수다. 생글생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아서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오신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부글부글. , , 언제까지 기, 기다려야 하는데? 실수다. 또 흥분하면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다. 괜스레 약점 잡힌 듯한 기분이다. 담당직원은 여전히 글쎄요, 어제도 글쎄요, 오늘도 글쎄요. 나야 말로 글쎄올시다. 나는 오히려 더 세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무, 무슨 허, 허가가 이, 이렇게 늦게 나,나온단 말이요? 한산했던 구청에 적막이 돌았다. 모두의 눈이 나를 향했다. 각오했다. 오늘에야 말로 내 허가를 받아가리라. 담당직원은 토끼눈으로 나를 보며

 

글쎄요

 

라고 말했다. 구청 내부에는 다시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났고, 나는 괜스레 소란을 피운 구민이 되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온 것이다. 속으로는 몇번이나 내 아들놈이 행시만 붙으면, 이라는 말을 삼켜내고 있었다. 나도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담당직원은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점심시간인데 식사 같이 하실래요?

 

라고 조용히 말했다. 식사는 무슨 놈의 식사. 허가나 내주쇼. 담당직원은, 글쎄, 식사를 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라고 작게 속삭였다. 내 호통에 눈치가 보이긴 한 것 같다. 나는 담당직원이 건네준 식당 명함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약점을 노출했지만 승리한 것 같이 뿌듯했다. 식당에 도착하여 안내해준 방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될 것 같아! 한다면 내가 하는 남자지!

 

10분 후 담당직원이 왔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곤란합니다. 곤란해요. 곤란합니다. 엄연히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는데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합니다. 초밥 세트와 알탕이 나왔다. 초밥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담당직원은 비슷한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늬앙스와 같은 그런 것이 달라지며 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광어 지느러미 초밥 하나, 곤란해요. 새우초밥 하나, 그러니까 말이죠. 계란말이 초밥 하나, 약간의 그. 도미 초밥 하나, 성의만. 요컨대 녀석의 말은

 

조그만 성의만 있다면.

 

아아, ? 내가 말하자 녀석은 얼굴이 밝아지며, 아후 이런 일 한두번 하시는 것도 아니시면서, 새삼스레. 나도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후 이런 일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얼마를?

 

20.

 

20이면 바로 가능합니까? . 오늘 허가증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마무리. 3층에 세를 준 남자가 물이 새서 못살겠다고, 월세도 못내겠다고 빽빽 우기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서 한숨 쉬며, 알겠소. 담당직원은 미소가 반짝.

 

집으로 오는 내내 공무원 욕을 했다. 이 빌어먹을 공무원놈들, 내 아들이 행시만 붙으면 이런 시키들 다 잘라버리라고 해야되겠다. 손에 든 허가증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곧 온다는 장마에 공사를 미룰 수가 없었다. 죽고 죽고 광어도 죽고 도미도 죽는 드라마의 내용이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이 놈의 나라가 글러먹었다.

 

아내가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수고했다고, 그래도 된 것아니냐고 했다. 등산화를 벗어 신발장에 넣었다. 아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등산화를 벗고 바닥에 턴 것도 본 것 같다. 오늘은 이래저래 약점만 잡힌다. 전화가 왔다. 아들놈이다. 아버지 저에요. 그래그래, 아들.

 

, 행시 포기할게요.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 그러냐. 아내가 내 표정을 살폈다. 아들은 행정고시를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나이는 먹는데,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으니 공무원 시험을 친 후 행정고시 준비를 병행하겠다고 했다. 눈앞에 구청의 담당직원 얼굴이 아른거렸다. 화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아들놈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그러려무나.

 

귓등으로 엿듣던 아내는 가만히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민찬이는 똑똑하니까 잘할거에요. 아내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그런 걱정이 아니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신발장에 놓인 등산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앞에는 글쎄요, 라고 미소 짓는

 

아들놈이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