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단편소설] 출근길
7시 40분. 버스가 늦다. 3분 후에 도착한다는 버스는 감감무소식이다. 또 학교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럴거면 차라리 걸어서 창동역까지 가는 것이 낫겠다고 매일, 7시 40분에 생각을 한다. 생각만 한다. 머릿 속에는 깜빡이는 비상등을 켠 수많은 차량들이 본인의 자식들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와 다녀올게 라는 인사 소리. 그 뒤에, 아주 아주 뒤에 여유로운 우리 버스 기사님. 누군가의 자식들의 등교를 위해 내 출근이 위협 받고 있다. 3분이 30분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결국 정류장 뒤편으로 돌아가 가방 속 파우치를 연 후 담배를 입에 문다.
아침에 피는 담배가 몸에 더 해롭다고 했는데, 라고 생각만 한다. 한손으로 머리를 만진다. 마르지 않은 머리 덕분에 한기가 스친다. 퍼져가는 담배연기 사이로 한숨이 섞인다. 어제는 회식이었다. 나는 가지 않았다. 생리통이 심했다. 차장은 회식 빠지는 사람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데, 라며 웃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두 내게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지만 전쟁통에서 혼자 탈출하는 듯 보고 있었다. 생리통도 전쟁통이었다. 담배를 비벼 끄며 출근 후 쏟아질 눈빛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단체생활에서 이기적인 사람들이 너무 싫은데 어느새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회식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그냥 조금 억울했다. 다시 느끼지만 본인의 상황이 되지 않고선 아무도 모른다. 아니, 본인 사정만 생각한다. 아, 나도 그랬던 것일까.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는데 회식 자리에 참석해야 했던 걸까. 혹시 그걸로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다음주면 결정이 난다. 그러고보니 어제 진심으로 내 몸을 걱정해주고 어서 집으로 가라고 말해줬던 인턴 동기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두색 버스가 보인다.
7시 52분. 창동역 도착 예상 시각은 대략 8시 3분. 오늘도 뛰어야 한다. 8시 5분 창동역 출발 열차를 타야 한다. 그래야 앉아서 갈 수 있고, 그래야 하루를 버틸 수 있다. 진동이 느껴졌다. 까만 액정에는 '아빠'라는 두글자가 보인다. 메시지다. 심장이 조금 두근거린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겁도 난다. 나는 가만히 보다 액정을 끈다. 두달 전 통화를 마지막으로 처음 온 연락이다. 버스는 사거리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꼬리를 물고 문 차들이 직진 차선까지 막고 있다. 버스 기사는 신경질적으로 클락션을 울려댄다. 나는 창밖을 보며 아빠를 생각한다. 두달전 마지막 통화에서 아빠는 조금 외롭다고 했다. 그 날은 회식이 있었고 나는 조금 취해있었고 차장은 노골적으로 내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한 날이었다. 무서웠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날 아빠는 조금 외롭다고 했다. 곁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취한 목소리였다. 나는 짜증을 냈다. 이게 누구 탓인데. 그렇게 전화를 마쳤다. 그후로 연락이 없던 그는 이렇게 두달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혹시 유서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싫어서 그냥 짜증이 솟구친다. 10년을 넘게 떨어져 살았다. 잘 곳이 없었던 경우에도 먹을 것이 없었던 순간에도 나는 아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빠는 그만큼 잘못을 했고, 그만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떠올라 겨우 버티고 있는 지금에 누가 될 수 있을 이 메세지가 싫다. 이러면 안되는데, 라고 생각만 한다. 메시지는 한번이 끝이었다. 다행이다. 이따 확인해야지. 핸드폰을 가만히 뒤집어 손에 쥔다. 창동역이 보인다. 버스 안은 어느새 습기가 가득 찼다. 그런 날씨가 되었다. 머리를 만진다 여전히 축축하다. 문이 열린다. 달린다. 창동역이다.
회사와 가까운 출구로 바로 내리려면 3-1 출입구로 가야한다.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계단을 오를 때는 속옷이 보일까 가방으로 가린다. 혼잡함을 틈타 몸을 스치려는 남자들을 피한다. 자리에 앉기 위해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의 줄 사이사이를 가방을 앞세워 뚫는다. 가방에는 노트북이 들어있다. 무겁지만 어쩔 수 없다. 회사에는 컴퓨터가 없다. 인턴 계약직이라는 것이 그렇다. 3-1 출입구가 보인다. 하지만 정확히 목표 출입구에 서진 않는다. 지난번에 과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침은 먹고 다니냐. 아니다. 앉아 있어라. 나는 남자라서 괜찮다.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냐. 그 나이때면 열심히 사랑을 나눠야 한다. 아침에 애들 깨우는게 보통 일이 아니다. 너는 나중에 아이는 한명만 낳아라. 남편도 고생한다. 아침에 고등어 조림을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하다. 나는 아침에 생선을 잘 못먹는데, 마누라는 아직도 그런걸 모른다. 애가 똥을 쌌다. 4살에 오줌도 아니고 똥을 싸니 환장할 노릇이다. 정확히 8시 30분부터 9시까지 30분동안 과장은 이야기를 그치지 않고 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절대 3-1에는 타지 않는다. 출근 시간은 소중한 정비의 시간이다. 열차가 온다. 나는 노트북이 든 가방을 가슴에 끌어안고 앉을 채비를 한다. 문이 열리면 한바탕 전쟁을 치룬다. 그래도 나는 앉는다. 창동역에서 이미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모두 가득찬다. 눈을 감는다. 벌써 피곤함이 몰려온다.
잠깐 잠이 들었다. 동대문이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내렸고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다시 탔다. 두터운 외투에 무표정. 음악을 껐다. 이어폰을 빼진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가라앉은 공기가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차곡히 포개어 있다. 어림잡아 300명은 타고 있을 듯한 공간에서 누구 하나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과장이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금방 마음을 접었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싫다. 대부분 핸드폰을 꺼내들고 있다. 저 작은 기기로 말을 대신하는 걸까. 이대로 1억년 정도 흐르면 인간의 신체에서 성대는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살아보니 항상 말이 문제였다. 아빠는 보증을 서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도 같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지난 일. 문득 아빠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핸드폰을 연다. 다시 조금 두근거린다. 메시지는 유서는 아니다. 매번 연락이 올때 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다행.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겠지만, 어쨌든 잘 지내지? 나는 잘 지내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을 한다. 인턴 계약 기간 종료가 다가오고 나는 회식을 빠졌다. 대출 이자를 갚고나면 한달에 3번 점심을 먹지 못한다. 정규직 전환마저 되지 않는다면 다시 아르바이트 신세다. 나는 멍하게 핸드폰 자판을 보다, 잘 못지내 라고 쓴다.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하다 그냥 다 지워버린다. 잘 지내는 일이 생기면 잘 지낸다고 답장을 해야겠다. 앞에 선 승무원 차림의 여자아이는 싱글벙글 핸드폰을 두드린다. 다시 눈을 감는다. 충무로역이다.
갈아타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옆에 앉은 남자는 자꾸만 내 쪽으로 기댄다. 도대체 머리는 언제 감은 것일까. 앞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다. 중심을 잃은 남자는 침을 닦으며 다시 자세를 잡는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털어낸다. 다시 진동이 느껴진다. 형일이다. 지난 주말에 느닷없이 찾아온 그다. 그날은 지금 생각해보니 화장도 지운 상태였다. 이제는 나도 그도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날 그는 매우 취한 상태였다. 어디서 술을 먹고 왔는 지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끙끙거리며 옷을 벗기는 내게 그는 무척이나 협조적이었다. 어딘지는 알았을까. 오늘 후배들을 만나서, 내가 쐈어. 그는 침대에 엎드린 채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돈이 바닥이 났네, 라는 말도. 면접은? 내가 물었지만 그는 후배들이 너보고 예쁘대 라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한번 기다려보자. 내가 대답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후 그는 화장실을 한번 다녀왔고 우리 술 한잔할까 라며 물어왔고, 나는 출근해야해 라며 거절했다. 그는 곧 코를 골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하나 폈고 양치를 했고 불을 껐다. 곧 잠이 들었다. 한밤 중 그의 가녀린 손이 느껴졌지만 나는 생리야 라고 거짓말을 했고 곧 다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퇴근 후 돌아왔을 때 그는 없었다. 그리고 며칠만에 온 연락이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돈을 좀 빌려달란다. 머릿속에는 이번달 수입과 지출의 플러스 마이너스가 빠르게 지나간다. 아, 이번 달엔 대리님 결혼식이 있다. 곤란하다. 친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에, 심지어 같은 팀도 아니다.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간 자리에 불쑥 나타난 대리님은 말 한번 섞어 본적 없던 내게도 청첩장을 건네줬다. 그리고 그 후로는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인사를 했다. 나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결혼 후에도, 아니 내가 정규직 전환에 실패를 했을 때도 아는 체 할까. 아마도 아니겠지.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만 한다. 아마도 나는 가게 되겠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4호선을 타고 2호선을 타고 분당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가게 되겠지. 축의금은 3만원만 내도 되려나. 요즘에는 축의금을 얼마씩 내는 걸까. 역시 5만원부터 일까. 5만원이면 일주일 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다시 진동이 울린다. 빌려줄거야, 말거야? 형일이의 닥달. 나는 멍하니 액정을 본다. 언제, 갚으려나. 언젠간 갚을까. 형일이는 언제 취직을 할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좋을텐데. 졸업하면 학교 사람들은 그만 보려나. 그럼 씀씀이도 좀 줄어들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생리통도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다.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무거운 공기를 뚫고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이대로 어디론가 떠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액정을 켠 후 형일이와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얼마나 필요한데? 전송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돌아올 메시지를 기다린다. 메시지 옆 숫자 1은 그대로다. 확인하지 않는다. 한창 자고 있을 시각인데 다시 잠든 걸까. 3만원이면 되려나? 역시 5만원은 필요할까? 아무래도 역시 잘 못지내는 것이 분명하다. 옆에 앉은 남자는 여전히 내 쪽을 향하고 있다. 나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어낸다. 그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을 깨는 시늉을 한다. 나는 믿지 않는다. 다시 잠들테니까.
다시 진동이 이어진다. 형일이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싶어 확인하니 차장이다. 공공장소에서 전화를 받는 건 싫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조용히 속삭인다. 여보세요. 커피 좀 사와. 네? 오전에 팀 회의가 있으니까 커피 좀 사와. 결제는 나중에 회사 카드로 해줄게. 9시 회의니까 시간 맞춰서 사와. 이 지하철은 8시 55분에 도착한다. 그럼에도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만다. 차장은 다음주에 심사인 거 알지, 라며 전화를 끊는다. 역시 배려심이 강하신 분이다. 나를 집에 데려다 준다는 그 배려도 잘 받았어야 했나 싶다. 5분만에 어떻게 커피를 사갈 수 있을까. 급해진 나는 인턴 동기들에게 연락을 한다. 돌아오는 답은 모두 본인도 늦었단다. 회사 주변 오피스텔에 사는 그들은 한번도 지각은 커녕 아슬아슬한 정시 출근을 한적도 없었다. 두통이 심해진다. 다음주 심사라는 차장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주말도 없이 달려온 6개월이 뭐였던걸까 싶다. 8시 55분에 내려서 커피를 사가는 것이 이 기나긴 6개월 인턴 심사의 마지막 관문인가 싶다. 직장인들은 커피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걸까. 커피가 그렇게 대단한걸까. 커피를 사서 지각을 하든, 커피를 사지 않고 회의를 참석하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오늘도 또 마이너스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아냐, 아니다. 해야 한다. 나는 어제 회식을 빠졌고, 차장의 배려를 거절했다. 그러니까 해야 한다. 회사 근처 카페에 커피를 미리 예약둔 후 내려서 바로 찾아간다. 그러면 9시에는 도착할 수 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핸드폰 검색을 하던 나는 곧 핸드폰을 덮는다. 커피 9잔 값이 없다. 속상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때 다시 진동이 온다. 동기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액정을 열었지만 형길이다. 10만원만. 눈물이 왈칵. 손이 조금 떨린다. 10만원 없어. 전송 버튼을 누른다. 도대체 언제 갚을 건데?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건데?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나도 힘들어. 전송버튼을 누른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해봤지만 인턴 동기 메시지 방은 조용하다. 어쩌면 나를 제외한 메시지 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우씨는 부모님이 대학교 교수라고 했다. 미영씨는 대기업 간부의 딸이다. 그정도면 커피 값 정도는 있겠지? 아빠가 생각난다. 고개를 흔들어 아빠를 지운다. 부질없다. 흔들림에 눈물이 날린다. 말랐던 머리가 다시 젖어간다. 속상하다. 원망도 부질없는 것을 안다. 그래도 속상함은 어쩔 수 없다. 진동이 온다. 기대감에 바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형일이다. 맥이 풀린다. 누가 취직하기 싫다고 했어?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인턴한다고 유세 좀 그만 떨어. 연속으로 날아드는 그의 말에 나는 액정을 꺼버리고 만다. 이번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대신 두통이 심해진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본인의 요구를 거절하면 무시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 숨이 조금 더 거칠어진다. 결국 나는 오늘도 마이너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갚진 못하고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속상하다. 진정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린 곳엔 4호선 노선도가 있다. 서울을 가로지른 파란선은 지도의 끝까지 이어져있다. 나는 신용산에 있다. 미로 같은 노선도의 정중앙이다. 나는 한동안 그 곳을 멍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본다.
쉬고 싶다. 며칠만이라도 아무런 신경도, 걱정도 없이 쉬고 싶다. 도대체 언제 쉬었던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도 일의 연속이었다. 스무살 이후에도 마찬가지. 오후 세시 이후로는 강의도 잡을 수 없었다. 세시 반 출근에 열한시 반 퇴근. 과제를 하고 나면 새벽 두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오전 아홉시 첫 강의. 주말은 주말 아르바이트. 그러다 교수님 추천으로 졸업 전 인턴 확정. 그리고 지금. 커피 하나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처지. 차라리 다음주에 정규직 전환 심사에서 떨어지면 조금은 편해질까. 그렇다면 당장 다음달은 무엇으로 생활을 할 수 있지? 대리님 결혼식은 안가도 되겠다. 5만원 굳었네. 대신 500만원의 빚은 연체되겠지. 어째서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돈은 없는 걸까. 진동이 두번 온다. 액정에는 형일이라는 이름이 뜬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다시 뒤집어 둔다. 형일이랑은 언제까지 만나야 할까. 머리가 조금 아프다. 생리통 때문인지 성장통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뒤집어진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흘러내린 머리를 부여잡는다. 형일이 전화다. 진동을 끄고 다시 뒤집어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칠흙같은 어둠을 지나치며 달려나가고 있다. 창엔 수많은 사람들이 비친다. 나만 힘든 것은 아닐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눈으로 좇던 나는 익숙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과장이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힐끗 본 그는 가득찬 사람들에 밀려 자꾸만 문 밖으로 밀리고 있다. 도저히 몸을 돌려 나를 볼 수 없다. 그것을 깨닫은 순간 나는 다시 과장을 본다. 과장은 꼼짝도 못한 채 밖을 보고 있다.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는 그저 눈만 깜빡이며 어둠 속을 볼 뿐이다. 과장의 머리가 조금 희끗하다. 과장은 회사에서도 에너자이저로 통한다. 불같이 기뻐하고 불같이 화를 낸다. 그의 부서에 속한 누군가가 따라가기 벅차다고 할만큼, 그는 항상 아우라 가득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그런 그가 저렇게 차분하다니. 조금 슬퍼보였고, 또 조금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도 그랬다. 사업을 했던 아빠가 그랬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언제나 힘이 넘쳤다. 내가 깬다고 엄마가 다그쳐도 아빠는 항상 목소리가 크고 동작도 컸다. 아빠의 큼직한 울림이 들리면 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고, 지금은 없는 엄마가 그랬다. 하지만 아빠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예전에 섰던 보증이 칼이 되어 돌아왔을 때 아빠는 큼직한 발소리를 잃었다. 그 다음은 이성을 잃었고 마지막으로 엄마를 잃었다. 나는 과장의 눈을 본다. 어둠이 스친다. 그도 어떤 류의 커피를 사야 하는 걸까. 지금 아빠의 눈도 저럴까.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한강이다. 곧 도착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커피도 회의도 형일이와의 관계도, 그리고 아빠의 메시지에 대한 답도. 한강이 보인다. 처음 인턴 출근할 때가 생각난다. 매일이 생일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플러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아마 이 한강을 건너고 있던 때였으리라.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 6개월동안 나는 많은 것을 잃은 기분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힘들다. 모두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나만 이런 것일까. 어른들은 커피를 먼저 살 지 회의에 참석을 할 지 잘 결정할 수 있는 걸까. 엄마가 있었다면 나도 잘 할 수 있었을까. 다시 진동이 온다. 아빠다. 왜 답장이 없냐는 메시지를 가만히 보다 잘 지내라고 짧게 메시지를 보내고 액정을 끈다. 잘 지내지 못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냐는 메시지가 올 것이 뻔하다. 무슨 일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그냥 잘 지낸다. 다시 핸드폰을 열곤 아빠도 잘 지내야해 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린다. 잘 지내줘요.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형길이는 이후 연락이 없다. 왠지 앞으로도 연락이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역은 이수역이다. 8시 55분. 내려야 한다. 과장도 그 좁은 틈에서 가방 속을 뒤져 지갑을 꺼낸다. 옆자리 남자도 내릴 준비를 한다. 30대 정도로 보인다. 벌써 머리가 휑하다. 갑자기 측은한 감정이 든다. 어쩌면 이 남자는 어제 회식을 한 것이 아닐까. 새벽 4시 정도까지 술을 퍼마셨고 집에는 기어서 들어갔으며 아내의 몸에 손을 대다가 생리라는 아내의 말에 2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나온 것은 아닐까. 회식을 했던 우리 팀 사람들도 다들 이렇게 출근을 하는 걸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수십년 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걸까.
지하철 문이 열린다. 성질 급한 할머니가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탄다. 표정을 찌푸린 여자가 내린다. 그 뒤를 과장과 옆자리 남자가 따라내린다. 둘다 표정은 없다. 나도 내려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들이 어쩐지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움켜쥐고 일어서기 위해 고개를 든다. 노선도가 보인다. 미로 한가운데 내가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문이 닫힌다. 눈을 감는다. 이 열차는 오이도, 오이도로 가는 열차입니다. 방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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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는 무슨 섬일까. 야자수가 있고 열대과일이 열리는 그런 무인도 비슷한 것일까. 그곳은 추근덕거리는 노총각 차장도 결혼식 청첩장도 없는 곳일까. 그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