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부터 꽤 산만
했다. 사실 산만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날은 하나 밖에 없는 딸, 희원이의 대입 수능날이었다. 당신, 내일 아침에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해. 알았지? 라고 몇 번을 강조했지만 콩콩 뛰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와이프도 나도 이 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잘 잤니 라고 해도 입에서 나오는 무게나 톤은 이미 갈 길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와이프는 호두를 잔뜩 넣은 호두밥을 준비했다. 난 한사코 반대를 했지만, 그녀는 눈빛으로 이것만, 이것만 이라고 외치고 있었기에 난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호두밥
이라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그렇게 그 날의 아침은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희원이가 나온 시각은 6시 30분. 희원이 방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나와 와이프가 오히려 더 놀라버렸다. 도둑질을 하던 것도 아닌데, 작은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의 동공 크기만을 확인했다. 이윽도 희원이 방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와이프와 나는 괜한 헛기침을 남발했다. 헛기침이 지구를 흔드는 것 같았다.
아빠, 나 일어났어. 응. 자, 잘 잤니? 아니. 계속 설쳤어.
아, 지구가 무너지는 기분. 나는 왜 설쳤냐는 둥 도라에몽이 방해를 했냐는 둥 말도 안되는 소리로 희원이를 달래려 애를 썼다. 희원이는 웃으며, 양차하고 올게 라고 했다. 멀뚱히 거실에 서있는 나를 보며 와이프가 웃었다.
당신같지 않다며.
우리는 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호두를 씹었고 계란을 갈라 놓았고 김을 싸먹었다. 내 신경은 오로지 딸에게만 쏠려 있었다. 급하게 먹지는 않을까, 혹여나 너무 많이 먹어서 졸리지는 않을까.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 지 와이프는 식탁 아래로 나의 여린 정강이를 걷어 찼다. 아, 지구가 갈라지는 아픔. 희원이는 웃었고 나는 아팠고 와이프는 눈을 번쩍하고 뜨고 있었다. 역시 산만한 날이다. 그렇게 희원이는 배정 받은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이런 날은 아빠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 그래? 당연하지. 희원이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정말? 정말. 와이프의 눈에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축 늘어져선 소파에 앉아있었다. 다녀 올게요 하고 나간 희원이의 잔상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렸다. 지구를 구하러 가는 여전사의 뒷모습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마 와이프도 그런 류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 툭 건들면 부러질 것 같던 희원이가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어느새 여전사가 됐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아마 와이프도 이런 류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 멍하니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앉아있는 내 옆으로 와이프가 슬며시 끼어들며 손을 잡았다. 거봐. 역시
와이프도 이런 류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난 이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게. 응. 희원이는 내가 데리고 올게. 그래, 그럼. 와이프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아침의 산만함이 가득한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의 시간 공백을 느끼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
지구의 용사는 여기에도 있다.
*
노을이 제법 어둠을 몰고 왔는데도 아직 희원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끝났어 라는 세 글자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가진 말이었다.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다니. 이럴수가. 내 딸이 아빠에게 이모티콘 하나 없이 메세지를 보냈다니. 나는 딸이 등교를 하는 골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마음 속으로는 평소처럼, 평소처럼 이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물론, 될 리가 없겠지만.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로 났다. 안돼. 담배는 악당을 상징하는 것이지. 지구의 여전사의 아빠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니 말도 안된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희원인가?
애미다.
아, 어머니. 그래. 희원이는 도착했고? 아뇨. 아직이에요. 어머니는 몇 번의 기침을 했다. 귀로 울리는 그 기침 소리가 호두같은 내 뇌를 흔들었다.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감기보다는 손녀딸의 수능 시험 결과가 더 중요했던 어머니였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오랫동안 울리던 어머니의 기침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대입 시험을 봤을 때 어머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학력 고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두부를 썰고 계셨다. 집 안에는 온통 김치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언제부터 끓이고 또 끓이고 계셨는 지 자박자박해진 김치찌개였다. 어머니는 말 없는 아들에게 커다란 고기 한 점을 올려주시며, 그래.
후회는 없나?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을 다했어요 라고 말하고 한없이 울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식탁 앞에서 엉엉 울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생각난 것도, 긴장해서 몇가지 문제의 답을 미뤄서 작성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울음이 나왔다. 아마도 어머니가 주신 고기 한 점의 무게가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지구만큼 무거웠던 고기 한 점.
아직 희원이 안보이재?
네. 아직이요. 그래. 니도 고생이 많다. 몸도 안좋은데. 기침을 하시며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당신의 몸은 둘째고 아들의 건강을 먼저 챙기는 마음. 희원이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나는 희원이가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노을은 이미 어둠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졌다. 바람이 불었다. 휭휭. 멀리 희원이가 보인다.
*
웅크린 모습
에 어쩐지 그렁그렁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멀리서 보이는 희원이는 아직도 작고 몸이 약한 아이 같았다. 섣불리 딸이라고 부르기도, 그렇다고 부르지 않기도 망설여졌다. 희원이는 그저 땅을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보도블럭 하나, 하나를 눈에 담으려는 듯. 이 지구의 마지막 하나라도 눈에 남기려는 듯.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끝났어 라는 이모티콘 없는 메세지는 결국 부정적인 것이었나. 혼란스러웠다. 딸을 20년 동안 키웠지만, 수능 본 딸을 맞은 경험은 없었기에 나는 또 어쩔 수 없는
초보 아빠
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여전히 슬펐다. 보다 완벽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윽고 희원이는 나를 발견했다.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어쩔지 슬퍼보였다. 그렁그렁, 그렁그렁. 지난 2년은 희원이에게도 내게도, 그리고 와이프에게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2년 전 어느 날 나는 쓰러졌고, 수술을 받았다. 사실 나는 쓰러질 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는 부분은 한 가지. 그 날은 3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그런 날들이 이어지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시 희원이와 와이프를 거의 버린 채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었다. 그리고 1년에 걸친 투병생활. 와이프와 희원이는 단 한번의 싫은 내색없이 나를 돌봐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화이프의 목에 작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희원이의 손이 너무나도 작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야, 우리 아빠 울었어?
희원이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 내가 좋아하는 딸의 모습. 나는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도대체 왜 수능날만 되면 우는 것인가. 알 수 없다. 희원이는 연신 아빠, 아빠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시험은 어떻게 되었냐고 언제, 어떤 타이밍에 물어야 되는 거지? 알 수 없다. 그냥 지금은 희원이가 웃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잘 봤는 지 안 궁금해?
집이 보이는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희원이가 물었다. 궁금해, 사실. 내가 대답하자 희원이는 비밀이라고 소리치며 아파트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역시 지구 여전사의 비밀은 함부로 알 수 없다. 나는 발검을을 빠르게 옮기며 희원이가 들어간 입구로 향했다. 아파트 1층에 들어서도 딸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확인해보니 5층에 멈춘 채 움직임이 없었다.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훌쩍이는 소리도. 희원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
응. 아마도 희원이가 있는 곳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 어딘가. 나도 계단에 앉았다. 아빠, 나 생각보다 시험이 어렵게 느껴져서 망친 것 같아. 어떡하지? 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파트 복도의 가라앉은 공기도 떨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될 지 몰랐다. 어떤 말이 정답인지. 어떤 말이 고수 아빠의 말인지. 나는 몰랐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괜찮아. 후회는 없니?
음, 최선을 다했어.
그래, 그거면 엄마랑 아빠는 만족해. 나는 희원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딸은 그런 아빠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건네자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오르며 집으로 향했다. 3층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자박자박한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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