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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단편소설] 숙면

by 어푸푸푸 2023. 7. 12.

 

두시간 뒤면 아이를 만난다. 지금 내가 해야될 일은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사는 일. 하지 말아야 될 일은 괜스레 감정적인 상태가 되는 일. 억울하다고 하면 억울했고, 내 탓이네 라면 또 내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그 일이 무뎌진다. 22살 미혼모의 삶은 그래서 고달프다.

 

누나, 이따 형호 데리고 7시까지 가면 되는거지?

 

동생 민오의 문자가 왔다. 7시라는 시간이 정해짐에 뭔가 목이 답답하다. 세시간 전에 타놓은 식은 믹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어째서인지 대답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문득, 문득 떠오른 그 날의 기억이 다시금 뇌를 뒤집어 놓았다. 6년이 지났고, 그 6년은 시벌 엿같은 을 내탓이네, 내탓이오 로 돌려놓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응어리진 그 무엇이 남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5시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5시 30분이면, 그와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 2년 간 수도 없이 싸웠던 그와의 통화. 실체 없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던 나날. 그는 곧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 날의 넌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 마시던 커피가 든 종이컵을 책상에 던지듯 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응, 고마워. 동생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 밖에 없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수민이의 생일날이었고, 수민이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했다. 엄격했던 부모님께 몇번의 확인 전화를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얻은 자유를 너무 헐겁게 놓아버렸다. 수민이는 남자들을 불렀고, 그 들은 손에 손에 손잡고 소주도 손잡은 채 들어왔고, 우리는 음악을 틀었고, 한사코 거부를 했던 내게 벌칙이라는 이름으로 술을 먹였다. 흑기사는 이름 그대로 흑했고, 나는 다음날 흑했다. 빨갛게 물든 아침. 하얗게 떨렸던 손. 이불 속에 보였던 그의 검은 중심. 색을 잃은 내 몸둥아리. 결국 그들 중 하나였던 그는 내겐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아비가 되었고, 그는 그들 속에 묻혀 손에 손잡고, 나를 부정했다.

 

시계가 어느새 6시를 향하고 있었다. 근 한시간 가량을 마무런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방을 챙겼고, 인사를 했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누구도 가방을 챙기는 사람은 없었고 회사를 빠져나오지 않았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런 취급은 괜찮다. 어차피 나 미혼모요, 라고 학교에 선언을 했던 그 무렵부터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수민이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1년과 2년 뒤의 미안함의 어투는 달랐고, 3년 후에는 미안함 자체를 회피했다. 거의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멋모르고 접근하는 남자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말로 나를 달랬고, 나는 그들의 배를 걷어 차버리고 혼자가 되었다. 아이에 대한 애정보다는 원망이 많았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본인의 말에 본인이 걸려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아이도 생명이니 낳거라고 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또렷한데, 그럼 여보, 우리 교회 어떡하죠 라는 목소리가 아버지의 목사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강제로 지워버렸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낳은 게 아닌 혼자가 되었다.

 

하필,

 

하필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필 아이의 생일날 그의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는 그가 제대를 하면 양육비를 내게 보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한번은 전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건만 그게 하필 오늘이었다. 말년 병장인지라 5시 반도 아닌 2시 반 언저리에 전화를 한 그는 내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양육비 말야. 어, 양육비 뭐? 그거, 내가 전역하면 너한테 줘야되잖아. 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수화기 뒤편에서 장난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수화기 너머에는 환한 어떤 것이 그려졌다. 유독 사무실이 침침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을 때 내렸던 비구름이 아직도 창밖을 어슬렁거렸다. 한참동안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쩌면 후임이라고 하는 놈과 장난질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몇초의 시간이 흐른 후 수화기 너머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

 

야, 그거 양육비 5만원씩 주면 안되냐?

 

빗소리가 거세졌다. 나는 순간 이새끼를 거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야, 야를 종료버튼으로 되받았다. 미친 새끼. 그 말만 머릿속에 남았다. 월 50만원도 모자랄 판에 5만원이라니, 어쩌면 이렇게도 무책임할까. 그는 지난 6년 간 단 한번도 아이가 잘 크느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애초에 궁금한 척도 하지 않았다. 범죄라도 저지른 것 마냥 잘못했다고 빌었던 꼬꼬마 중학생이 6년 동안 뻔뻔함을 배웠나보다. 나는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지 않은 채 화장실로 달려갔다. 미친 새끼. 아이의 생일인 건 알고 있었을까?

 

집에 오는 길에 제과점을 들렀다. 지갑을 열었더니 만원짜리 한장과 오천원짜리 한장이 들어있었다. 며칠 후면 월급날이었다. 해야 되는 일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요즘에는 돈에 자꾸만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진열대에 비치된 케이크 중 가장 싼 것이 19,000원. 결국 카드를 꺼내들었다. 통장에는 이번 달에 나가야 할 36,000원의 핸드폰 비용이 들어있었다. 제과점을 나오니 어느 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대학생. 나와 동갑, 혹은 어린 아이들. 짧은 치마에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 한 무리가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 그 오빠 스물셋이라며? 라는 말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스물둘. 내 아이는 여섯.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손에 쥔 핸드폰이 진동했다. 동생이었다.

 

이따 연락줘.

 

사실은 이게 아니었다. 한달 전 문득 아이가 내게 엄마, 생일파티가 뭐야 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한번도 내 아이에게 제대로 생일 파티를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파티까지는 아니지만,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그렇게 준비한 것이 오늘이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모텔 달방의 가격을 빼고, 교통비, 식비, 아이 어린이집 비용을 빼면서 약간의 여분을 계획했다. 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만원하고도 오천원. 내 탓이지만 내 탓이오 하기는 싫은 상황. 별 수 없지라고 쉽게 포기하는 내 자신도 싫은 상황. 손에 쥔 케이크 상자가 유독 가볍게 느껴졌다. 어느새 가득찬 어둠 사이로 네온사인 빛이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모텔촌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그 중 한 곳의 모텔로 발을 옮겼다. 나는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니는 여자였고, 유일하게 모텔 숙박비도 지갑에 없는 여자였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가방을 한편에 던지고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불을 켜지는 않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네온사인의 빛이 케이크 상자에 비쳤다. 나는 천천히 케이크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작은 케이크를 꺼내들었다. 초를 꽂고 동생에게 연락했다. 지금, 들어와. 라이터를 켜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텅빈 방 안을 위태로운 불이 일렁거렸다. 순간 무섭도록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7시의 모텔 거리는 한산했다. 나는 곧 침대에 누웠다. 테이블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이 그리는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노곤했다. 머릿속에 숫자들이 사라져갔다.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핸드폰 액정에 들어온 빛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