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였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신과 엮이게 된 것 같다는 생각. 그때의 난 꽤나 느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거 있잖아. 집, 회사, 집, 회사. 회사 일이 내 머리채를 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삶. 별다른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저 1m 반경만 보며 사는 거. 그래서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당신과 보냈으니, 그건 일종에 삶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당신과 동화되게 되었다고,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뇌까지 번졌다고.
나는 천성이 어딘지 모르게 둔한 사람이었다. 첫 섹스도, 첫 데이트도 잘 기억을 하지 못했다. 장소, 시간뿐만 아니라 당시의 감정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편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편했을 것이다.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나같은 성격은 편한 상대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당신은 편한 상대였다. 애초에 며칠부터 시작, 이라는 연애 따위를 하고 싶지도 않았던 내게 당신은 정말로 적절한 상대였다. 당신은 적당한 성욕이 차오를 즈음 내 방을 방문했고, 적당한 식욕이 생길 때 즈음 내가 좋아하는 스시를 포장해서 오곤 했다. 그런 패턴이 좋았었다. 당신과 나는 억지로 서로를 잡아 끌지도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많은 대화를 무리해서 하지도 않았고 불을 굳이 켜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꽤나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욕심이 생긴다. 그건 그거대로 골치 아픈 일들을 초래한다. 그런 사고 방식이 가득했다. 아마도 당신도,
그랬겠지.
며칠 전 당신의 아내라는 여자에게 전화가 왔었다. 차분한 것이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통화 내내 당신의 가정에서의 모습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모습이기에 이런 아내와 살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게 문제다. 요즘 내 스트레스의 근원. 나는 언제부터인가 당신에게 어떠한 류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당신과의 관계를 시작한지 8개월 만에 사랑을 느낀 것일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신의 아내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만해달라는 것. 당신의 딸이 곧 성인이 된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고,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데 자꾸만 기억된다. 당신의 모습 속에서 특정한 행동들도 머릿속에 담겨 있다. 아, 알았다. 당신도 어느새 내,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을
잘라내야 한다.
골치다. 당신의 아내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어제다. 당신과 함께 있냐고 했다. 나는 아니기 때문에 아니라고 했다. 며칠 전보다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였다. 다시 한번 당신의 딸이 내일 모레 성인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내일 모레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주일 정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의 관계를 아내라는 분께 들킨 날부터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회사를 이틀 연속으로 쉬었다. 어차피 당신이 회사를 이직했던 3개월 전부터 흥미를 잃은 곳이었다. 당신이 내 몸을 만졌던 그 쇼파에 가만히 널부러진 채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SNS엔 나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곧 성인이 된다는 당신의 딸이었다. 3년동안 안부도 묻지 않던 사람들이 진짜냐고 물어왔다.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핸드폰을 던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신의 물건인지, 내 물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같은 기종의 핸드폰 충전기에는 누구의 이름도 쓰여있지 않았다. 손에 잡히면 그것이 내 것이었다. 수저도 젓가락도 슬리퍼도, 무엇하나 애매하기만 했다. 정리를 하라고 하니 정리를 해야 겠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야 하니 곤란할 수밖에. 자연스럽게 손톱을 뜯고 있는 나를 인식했을 때 당신의 전화가 왔다.
알겠지?
알겠지, 를 몇번 반복했던 당신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한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기에 나는 정말 당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알겠어, 알겠어를 몇번 반복했을 뿐이었다. 당황한 당신 덕분에 나는 당신이 내 몸 어딘가에서 조금 삐져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이다. 지금 잘라내야 한다. 잘라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간단하다. 내 일주일의 하루를 잘라내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6일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던 여자였을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8개월 전의 내 생활패턴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그 사이의 난 무엇을 하며 살아왔을까.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 곧 그만뒀다. 이제 당신에게 연락을 하면 안된다. 곧 성인이 되는 당신의 딸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내 방에 자리 잡은 당신의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 간단한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명백히 당신의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 당신의 물건. 그것이 내 몸에서 삐져나온 명백한 당신. 그렇게 오늘 나는 당신의 파란색
칫솔을 버렸다.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파란색 칫솔 하나만을 담은 채 분리수거장을 다녀왔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칫솔 하나라는 것이 왠지 우습게 느껴졌다. 침대에 바로 누웠다. 어딘지 모르게 당신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만 같았다. 누운 채로 다시 한번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당신의 물건은 없었다. 인테리어를 조금 바꿔야 할까 하던 차에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에게서 다시 한번 전화가 왔다. 당신의 위치를 아냐고 했다. 내 방의 위치는 어디냐고 했다. 나는 당신의 위치는 모른다고 했고 내 방의 위치는 안다고 했다. 당신과는 확실히 정리가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칫솔을 버렸으므로 확실히 정리를 했다고 했다. 조금 기분이 찝찝했다.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당신은 내 방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칫솔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생리를 하지 않은 지 두달이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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