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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단편소설] 비상 비가 오면 학교를 가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할머니 곁에 있어드리고 싶었다. 예전엔 이런 날이야 말로 대목이지라며 집 밖을 나섰던 할머니였지만 얼마 전 그 사고 이후로는 발도 말도 멈췄다. 선생님의 전화가 두 번. 친구의 안부가 한 번. 그리고 여름이 지난 후론 누구도 찾지 않았다. 그렇게 비만 오면 우리 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무인도 같이 둥둥 떠있었다. 할머니의 손목엔 두 줄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한 줄은 알고 한 줄은 몰랐다. 딱히 묻진 않았다. 할머니의 인생이 고달프고 험난했던 것은 내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이 와도 깨지 않던 아비가 저녁을 지나 몸을 일으키고 온 밤을 헤집고 돌아온 후 다시 온 방을 헤집어 놓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 머리를 헤집.. 2023. 7. 12.
[웹소설/단편소설] 약육강식 약육에 강식이다. 아버지는 강하고, 나는 약했다. 술만 먹으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인지, 어릴적부터 이 인간에게는 복종하라고 세뇌를 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강하고, 나는 약했다. 나는 이것을 약육강식으로 이해를 했다. 새벽 6시, 누군가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놀라서 일어난 상황에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는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놀랄 오자를 그리며, 어버버. 나는 어떤 미친 새끼가 라면서도 몸은 이내 후덜덜. 아마도 그런 기분은 겪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 거대한 남자들 (아버지보다 훨씬 큰) 이 욕을 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 알고 봤더니 집을 나가야 하는 날이였댄다.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인지, 이것도 역시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는 레벨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철거일이 코 .. 2023. 7. 12.
[웹소설/단편소설] 당신의 칫솔을 버렸다 언제부터 였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신과 엮이게 된 것 같다는 생각. 그때의 난 꽤나 느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거 있잖아. 집, 회사, 집, 회사. 회사 일이 내 머리채를 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삶. 별다른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저 1m 반경만 보며 사는 거. 그래서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당신과 보냈으니, 그건 일종에 삶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당신과 동화되게 되었다고,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뇌까지 번졌다고. 나는 천성이 어딘지 모르게 둔한 사람이었다. 첫 섹스도, 첫 데이트도 잘 기억을 하지 못했다. 장소, 시간뿐만 아니라 당시의 감정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당신은 .. 2023. 7. 12.
[웹소설/단편소설] 양말은 두고 왔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앞으로 뒤로 밀고 당기면서 생각을 해봐도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내겐 인격이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 그래도 울었을 텐데. 울었을 텐데, 그러면 싫다는 의사표현을 분명히 한 것은 아닐까. 엄마라는 사람이 자식이라는 사람을 버리는 이유는 당연히 있겠지만 그 순간, 나를 놓고 떠나가던 그 순간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 기억이 존재하는 시간 이후로 줄곧 궁금했다. 왜 나를 버렸는지가 아니라 나를 버렸던 그 순간에는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바닥이 차가웠다. 여름이 지났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주에 비에 젖어있던 매트리스를 챙겨서 들고 왔어야 했다. 곰팡이가 얼룩져있었어도, 스프링이 .. 2023. 7. 12.